상징주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난 예술 사조로 자연주의나 고답파에 대해서 주관을 강조하고 정조를 상징화하여 표현하는 것을 주력으로 했다. 베를렌, 랭보 등이 대표적안 시인이며, 예이츠, 릴케, 마테를링크, 와일드 등 20세기에 주요한 문학자들이 주로 상징주의 시기에 탄생했다.
문학
문학에서의 자연주의는 상당한 혼잡아 초래되었다. 자연주의 문학에 대한 다양한 반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가장 강력한 발언을 한 것이 상징주의라 말할 수 있다. 자연주의의 과학적 결정론에 반대하여 상상과 몽환과 상징을 강조하였고 고체와 보들레르를 선구로 삼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말라르메를 꼽을 수 있고 위스망, 랭보, 베르아랭, 마테를링크 등이 있다.
불문학자 A.티보데는 상징파의 새로운 바람으로 이와같은 세 가지를 지적하였는데,
1. 자유시 : 딱딱하고 전통적인 양식을 탈피해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시의 조류를 뜻한다.
2. 순수시 : 산문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시적인 시를 지향하며,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발레리에 이르러 완성된 것으로 평가 받는다.
3. 문학적 혁신과 발전의 개념 : 상징파는 이전 세대가 수립해놓은 문학개념을 부정하는 권리와 의무를 처음으로 젊은 세대에게 인정하기 시작하며 이를 기준으로 전통적 문학과 전위문학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상징주의는 1920년부터 1924년가지 5년동안 자연주의와 함께 문예사상 지배적인 조류였는데 이들 모두 창조파에 기원하는 것이었다. [창조] 1호 김동인의 자연주의적 소설 '약한자의 슬픔'이 실렸을때에 시에서는 주요한이 상징파의 영향을 본따 '불놀이' 3편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또한 1921년에는 황석우릐 대표적 상징시인 [벽모의 묘]가 [폐허] 에 발표되었고, 변영로는 '상징적으로 살자' 라는 시론을 써냈고 그의 시도 언어의 기교를 상징성에 두었다.
미술
미술에서의 상징주의는 반사실주의적인 경향을 지향했으나, 문예의 경우처럼 명확한 주장이나 운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직접적으로는 비평가 오리에의 논평 '회화에 있어서의 상징주의'에서 고갱을 중심으로 한 퐁 타방 파와 고갱이 타히티로 떠난 뒤 오리에의 주장에 가까운 나비파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후의 논평에서는 고갱 등의 음악적, 장식적인 구성을 목표로 한 작품보다는 도리어 신비적인 주제를 취급하는 작품을 포함한다. 퓌비스 드샤바느, 르동, 카리에르 , 클림트 등이 대표적인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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