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비즘이라고도 불리는 입체주의는 조르즈 브라크의 풍경화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0세기 초 브라크는 프랑스의 남쪽 연안 지방 레스타크에서 사생을 하면서 풍경화를 그렸으며 이 풍경화를 두고 마티스가 입체적 희한함이라고 풍자하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이 단어에서 파생된 브라크의 표현 양식을 본 딴 그림들 및 화가들의 경향을 큐비즘이라 정의 내리게 되었다.
브라크는 레스타크 지방의 풍경화를 그리며 대상을 입체적 공간으로 나누어 여러 가지 원색을 칠하여 자연을 재구성하였다. 이와 같은 실험적인 공간 구성과 대상의 양식에서 출발하여 브라크와 피카소 등 입체주의 화가들은 점차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입체적인 형태, 즉 원통형, 원추형, 입방형을 선과 면으로 표현하여 하나의 화폭에 질서있게 쌓아올려 입체주의 기법을 발전시켜나갔다.
입체주의를 대표했던 화가들, 피카소와 브라크는 모두 완전한 추상을 원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그림은 화가가 느끼고 경험했던 대상을 여러 시점과 각도에서 한 폭에 그려내어 감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의 생동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완벽한 추상까지는 아니어도 입체주의는 대상에서 형태를 해방시키며 그 자신의 어법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수 많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는 미래주의, 다다이즘 등 이후에 나타는 많은 미술 사조에 영향을 주었다.
큐비즘의 역사
초기 큐비즘에서 세잔은 화가가 빛의 속임수를 그리고 현상을 모사하는 데 불과한 것을 불만으로 여겨 항구적인 자연을 그리려고 부심하였다. 세잔을 본따서 흑인조각에서 자극을 받아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것은 1907년의 일이다. 같은 무렵에 포비즘의 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브라크는 세잔이 말한 내용의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의 그 구절에 따라 에스타크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1908년 이 풍경화 6점은 살롱 도톤에 출품하여 결국 낙선이 되었으나 그 때의 심사위원인 마티스가 '이 그림은 작은 퀴브로써 그려졌다' 라고 말한 퀴비즘의 명칭을 만든 실마리가 되었다. 브라크의 화상은 칸와이러의 화랑에서 개인전으로 발표되었는데 그 화상이 피카소와 브라크가 추구한 내용들을 인정하여 1907년 가을에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두 사람은 협력의 관계가 되어 1910년까지 이 두 사람이 큐비즘을 이끌게 되었다.
분석적 큐비즘은 1913년~1914년에 이르러 종합적 큐비즘에 들어가는데 주로 피카소와 후안 그리스를 중심으로 추진되는 분석적 퀴비즘이 해체와 재구성의 사이에서 잃어버린 리얼리티를 되찾으려 하는 경향이었다. 분석적 퀴비즘은 병이란 대상에서 원통형을 추출하지만, '나는 원통형에서 병을 만든다' 라고 말한 것이 그리스의 입장이었다. 리얼리티의 회복이란 욕에 응하여 파피에 콜레의 수법이 개척된 것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피카소가 주도하던 전통적 큐비즘과 별도로 거의 1910년경부터 레제를 중심으로 개척된 방향으로 황금분할과 큐비즘이 있었다. 대상을 분해하여 재구성할 때 역동감을 도입하려는 것이며, 정물의 분야에서 성과를 올린 큐비즘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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